이 화백은 독도가 고지도에 있느냐 없느냐를 내세우며 역사적 자료로 독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로 독도를 지키는 것이 파장이 클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말 한다 "고지도의 어버이는 산수화 중 계화(계화)에 다름 아니다"라고. 일본은 물론 전세계 전시장에서 독도의 진경(진경)을 그려 명제를 한국의 'DOKDO'로 붙여 '우리 땅'으로 에술작품화 시키면 저들은 같은 섬을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그릴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통쾌했다고 한다. 그래서 1977년 당시 최순우 관장과 상의해 화가 최초로 단신 독도에 입도하여 많은 진경작품을 그려 기행문을 경향신문에 발표하며 동산방 초대로 '이종상 진경전'을 열고 독도문제화심기운동을 전개한다. 독도 스카프를 만들어 도쿄 신주쿠에서 전시한 것이 매진되어 '독도교주'라는 별명 이외에 '독도를 팔아 먹은 사나이'라는 역설적인 찬사도 받았다. 5년 후 가수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 대 유행을 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독도를 어떻게 문화로 지키느냐?"며 흉을 보던 때가 어제만 같은데 지금은 독도문화심기운동이 보편화 된지 오래다. 지금도 울릉도의 독도박물관과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빌딩 지하의 독도체험과에 가보면 이화백의 당시 도록과 독도를 상징하는 작품이 진열돼 있는데 일본인 들이 많이 다녀간단다. 그는 지금도 '독도문화심기운동본보' 대표와 전국 60인의 '독도문화의병대' 대장으로서 국토지킴이의 NGO활동을 계속하고 있다.